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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27일 월요일

도버 클리프

 

 

일단 점령하기만 하면 천혜의 수성 요건을 제공한다.

파리로 가기위해 유로라인을 타고 야간에 도버를 건넜다.
항만에 들어서면 좌우로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는 화이트 클리프의 위용에 압도당한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어깨마저 오돌오돌..

줄지어 선 유로라인 버스가 거대한 페리에 탑승을 마치고 갑판위로 자리를 옮겼다.
눈앞에 버티고 선 클리프에 주눅이 든다. 숨이 멎기를 여러차례.

클리프를 힘차게 발로 차고 거대한 배가 움직인다. 이 배도 꽤 컸지만 클리프 앞에서는 여간 초라하다.

영국에 오게 된 것과 관련해,
나의 선택이라기 보다, 밀리고 밀려 이곳까지 오게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영국을 잠시 떠나오는 이 순간에도 클리프는 내가 탄 배를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밀어내는 듯 했다.

하지만 클리프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내가 탄 배가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에 격하게 얻어맞은 듯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의 주위세계가 결국 내가 허락지 않았으면 내게 있지 못한 것들이란 생각을 했다. 내가 청하지 않았음에도 내게 와 있는 것들을 한 손에도 꼽지 못했다.

앗! 뜨거!!
타들어간 담배를 검지 손가락으로 튕겨 끄다가 불심이 청바지 오금에 앉았었나 보다. 구멍이 났다. 내게 일어난 대부분의 현상들은 내가 저지른 일들의 결과였다.

 

 

2004년 12월 21일 화요일

2004년 12월의 겨울

 

 

너를 그리워함에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지혜가 있다

양손을 옆구리에 파묻고 몸을 움추려 가슴을 굳게 닫으며
너의 체온에 견줄만한 섭씨 37도의 온기를 회상한다

그리움은 하늘로 뻗은 고드름

얼음처럼 찬 손가락을 펴
십년을 하루 같이 복용해 온 처방전을 새기다가

그 옛날 눈물조차 닦아주지 못했던 그 몹쓸 손바닥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슥슥 하늘을 문질러
너의 이름을 지운다

기다림은 그리 순박하거나, 고귀하지도 못한 손짓

해가 진 정류장의 오뎅가판은 더욱 희뿌연 김을 토해내고
하늘로 띄운 기도는 까맣게 밤하늘을 칠한다

 
 

봉숭아 보기


2004년 11월 27일 토요일

연탄 두장은 천원



전날의 술로 떡이 되어 사무실 구석에 쳐박혀 앉았는데,
체구가 작은 꼬부랑 할머니 한분이 소리도 없이, 마치 유령처럼 내게로 다가왔다.

곧장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연탄 한장값만 보태주세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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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안좋아지면서 업무외 이런 식으로 사무실을 찾는 발길에도 변화가 생겼다.
자동차, 보험, 카드 사원이 주를 이루지만
어쩌다가 한줄에 천원씩 하는 김밥 광주리를 든 할머니가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근래 김밥 할머니는 통 본적이 없고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이 만들었다며 칫솔 등 자잘한 생필품을 들고 사무실을 찾는 노인들이 늘었다.

그럴때면 난, 지금 쓰고 있는 내 칫솔을 슬쩍 한번 확인하고는 "아직은 멀쩡한데요, 지금은 필요하지 않아요" 한다.
고기집에 껌을 팔러오면 그게 오백원이든, 천원이든 고기집을 나가면 필요할테니까 꼭 산다.
가장 즐겁게 사는 건 쵸콜렛이다. 파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렇지 소년이 오든, 장애인이든, 할아버지든 가리지 않고 오히려 내가 고맙다. 좀처럼 쵸콜렛을 사기 위해 가게를 찾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외에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조차 난 순순히 받아주지 않는다. 기념품을 끼워서 주면 찾아가서 받아오는데,
전단지 아르바이트라는게 일단은 다 뿌려야 끝나는거고, 받는 사람이 받아서 휴지통에 넣든, 길거리에 버리든, 도와주는 셈치고 받아주면 어떠련만,
들춰보지도 않을 뻔한 전단지를 휴지로 만드는 일 따위를 굳이 내가 대신해 주고 싶지는 않다.

난 대략 이렇다. 좀 이기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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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연탄 한장을 사게 돈을 달란다. 어림없는 소리다.
없다고 할까? 돈이 있는데, 그건 거짓말이다.

순간, 그런데 연탄 한장에 얼마지? 천원쯤 하나? 궁금해졌다.
잠긴 목소리로 그 할머니의 목소리만큼이나 힘없이 물었다.

"오백원이에요"

아, 연탄 한장엔 오백원이구나.. 그럼 천원이면 두장이네..
결국 그 할머니는 나에게 연탄 한장의 값을 가르쳐 주고 연탄 두장을 얻게 된 셈이다.
사라지는 할머니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뭔가 통한걸까? 나란 놈의 행동양식을 어쩜 저렇게 잘 알지?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반응할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할머니네..

스스로 나답다는 생각을 하며 슬쩍 놀라는 때가 있다. 그랬다.

 

2004년 10월 24일 일요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中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상의 그 하고많은 나라중에서도 대한민국-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현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거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거다.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만난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거다.

 

인연이란게 좀 징글징글하지?

2004년 6월 8일 화요일

엄마의 깨알시

 

울 엄마는 문학 소녀였더란다.

어릴적 구멍가게 녹슨 초록 동전통 앞에서도
엄마는 끄적 끄적 초코파이 상자에
열갑 솔 담배가 담겨있던 보루봉투에
모나미 153 볼펜으로 깨알같은 시를 쓰곤 했었다.

신월동 대여섯평 가겟방에서도
엄마는 외갓집 들의 풀을 보며, 꽃냄새를 맡으며
물에 발을 담그고, 바람을 느끼며
시를 쓰곤 했었다.

왕년에 문학 소녀였더란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돌아다니다 결국은 내버려지는
그 포장지 위 깨알시들이 아쉬웠는지
어느해 생일에는 아들에게 시를 쓸 노트를 사달랬었다.

자식들 필통속에
예쁜 볼펜, 볼펜똥 안나오는 펜을 샘 많은 아이처럼 가져가서는
내일엔 뚜껑 없이 들고 다녔고
글피엔 153 볼펜을 도로 쥐었다.

엄마는 지금도 시를 쓴다

시를 쓰라 사다준 노트엔 '강물이 흘러간다'
몇줄 유치한 시들이 채워지는가 싶더니
어느날부터 빼곡히 창세기 출애굽기 필사본이 채워져갔다.

인생에 몇번 모질지도 못했어서
엄마의 깨알시는 볼펜똥 묻어나는 싸구려 볼펜으로
이것저것 싸맸던 포장지 여백에만 쓰여졌었지만

예쁜 맘 간직하며 써내려간 50줄 깨알같은 날들은
이 세상 어느 시보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시가 되어 읽힌다

 

2004년 5월 15일 토요일

答詩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나치와의 전투는 단 하루만에 끝이 났단다. 북해에 묻어놓은 잠수함 한척이 밭은 숨을 내쉬며 독일 잠수함에 의해 짓이겨지고 독일의 공군기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늘어뜨린 혓바닥 끝마디를 살짝 물려는 찰나에 스웨덴의 짱은 사나이답게 소리쳐 말했다. "내가 졌다. 그만해라"

그러고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전쟁이란 소리에 뒷주머니에 꽂아넣었던 하이데거의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2차대전이 종결되고 하이데거가 나치와 어울려 놀았다는 얘기가 전해졌지만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내가 머물러 있는 시간에 내가 존재할뿐이라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하이데거 그 녀석도 그랬겠지. 형이상학의 언어를 아무리 내뿜고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로 잘난체해도 결국 하루 한시간 일광욕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수용소보다 못한 삶이지. 폴란드에 있는 어느 수용소에서는 일광욕이라도 시켜줬다더라.

오늘처럼 흐린 서울하늘이라면 일광욕마저도 용이치는 않겠군. 박물관 뒷마당에서 젖가슴내놓고 햇볕 쪼이던 아가씨의 선글라스에 가려졌던 얼굴이 다시금 궁금해 지는군.

신동엽 시인의 散文詩1 에 대한 答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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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8일 토요일

엔디미온



루브르에 갔을 때였어.

이 그림에 매료되어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자리를 뜰 줄 몰랐지.

그 후로 본머스에 돌아가 도서관을 뒤졌지만 찾아내지 못했거든.

한국에 돌아온 후 인터넷을 통해 루브르를 다시 찾아가 이 그림을 발견했어.

평온한 엔디미온의 얼굴과 장난기 어린 요정, 그리고 신화가 말해주는 엔디미온의 삶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가게되는 것 같아.

Anne-Louis GIRODET DE ROUSSY-TRIOSON
Montagis (Loiret), 1767 - Paris, 1824

Endymion. Effet de lune, dit aussi Le Sommeil d'Endymion
Salons de 1793 et de 1814
H. : 1,98 m. ; L. : 2,61 m.

Zéphire écarte une branche de feuillage pour permettre à la lune (Séléné ou Diane) d'approcher le berger Endymion dont elle est éprise. Peinte à Rome en 1791, l'oeuvre emprunte à l'Italie le clair-obscur, le "sfumato'' vaporeux du Corrège et la grâce acide des Amours de Bronzino, mais l'éclairage lunaire, l'effet mystérieux et irréel appartiennent à une sensibilité nouvelle (dont Prud'hon est le meilleur représentant), qui s'écarte délibérement de David.
Acquis en 1818
Département des Peintures INV. 4935

from
http://cartelen.louvre.fr/cartelen/visite?srv=car_not_frame&idNotice=22511

지로데는 역사 관련 그림을 많이 그렸던 다비드의 생도였는데,

그는 초록 달빛 속에 목욕하는 암수동체의 "잠자는 엔디미온" 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비범한 솜씨로 제작하여 1789년 Prix de Rome償을 받았다.

지로데는 수많은 초상화를 제작하였고 여러 편의 대형 작곡도 시도했으나 미적 주제에 관한 고답적 시로 지칭되는 詩作을 위해 1812년 그림을 포기하고 만다.


신화속의 엔디미온은 라트모스 산 위에서 양을 기르는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어느 조용하고 청명한 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니, 잠자고 있는 이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처녀 신의 차가운 심장은 그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곧바로 매료되었다.

여신은 그에게 내려와 키스세례를 퍼붓고 잠들어 있는 동안 그를 지켜주었다.

또다른 전설에 의하면, 제우스가 그에게 영원한 청춘과 영원한 잠을 주었다고 하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극히 적다.

아르테미스는 그가 잠든 사이 그의 재산이 손실되지 않게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즉, 그의 양떼가 자유롭게 풀을 뜯고 번식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야수로부터 지켜주었다.


 

2004년 4월 26일 월요일

여우비야 내려라

 

내 이미지에 안어울리게 뚱딴지 같은 소리 하나 하지

어제 밤 집에 들어와 습관처럼 옷을 훌러덩 훌러덩 벗고

선풍기를 틀어놓은채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배가 싸하게 아파온거야,

괄약근에 잔뜩 힘을 주고 어기적 어기적 화장실 문턱을 넘어

변기에 걸터앉아서야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더라고.. 쯧쯧



눈앞에 예전에 가지고 들어왔던 스포츠신문들을 뒤적거리다가

눈길을 끄는 기사가 하나 눈에 뛰더군,

내용인즉, 남자와 여자가 애정상대를 찾는데 있어

계절과 날씨에 따라 상반된 경향을 보인다는거야.



가령, 여자는 봄에, 남자는 가을에 땡기고,

또 날씨로는 남자의 경우 눈,비 올때, 여자의 경우 맑은 날에

사랑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는구만,



그래서 아까 그 자세로 쭈욱 걸터앉아 생각을 좀 더 해봤지,

주변에서 최근 왜 연애 안하냐고 자꾸 물었던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때마다 아직은 혼자인게 좋다는 답을 생각없이 반복하다보니,

나도 긴가민가 하더라구.



사랑할 사람이 있었으면 싶기도 하고.

빗소리를 들으며 늦은 밤 쓸쓸이 변기위에 앉아 있기 때문이기도.



여우비 내리는 날이 좋을 것 같아.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하지. 마침 내가 호랑이잖아.

남자인 나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어딘가 있을 그녀도 나를 그리워할 그 날 아니겠어?


여우비만 내려봐,

그날부터 그녀를 사랑해 버릴거야.

 

 

그리움에 나를 잊는다

예전에 사귀던 여친과 빈번하게 싸우던 소재 중의 하나가 공중도덕에 관한 것이었지.
담배를 피우던 여친이었는데,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아무 거리낌없이 태연하게 버리던 그녀였어.

그렇다고 그녀가 주변사람들에게 모질거나 심성이 고약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단지 껌종이를, 담배꽁초 등등을 서슴없이 버린다는게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

급기야 길거리에서 티격태격 싸우다가,
횟수가 늘어날수록 언성이 높아지고
결국엔 내가 대신 주워 호주머니에 찔러넣어두었다가 보란듯이 휴지통에 넣는 일이 되풀이되었고.

결국은 다른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지만,

헤어지고 한참이 지나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돌아볼 때면
슬그머니 담배꽁초를 길에 버려본다.
내가 좋아하던 그녀의 몸내음이 맡아질 것만 같은 그 기분.

그리움을 핑게로, 내가 허락치 않았던 일탈을 가끔씩 자행하는... 난

아직도 공중도덕에 대한 사회적 약속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그때 우리둘 중 누가 옳았는지는 꽤 오랫동안 덮어두기로 하지.
아직은 그녀가 한동안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찾아들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