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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8일 화요일

엄마의 깨알시

 

울 엄마는 문학 소녀였더란다.

어릴적 구멍가게 녹슨 초록 동전통 앞에서도
엄마는 끄적 끄적 초코파이 상자에
열갑 솔 담배가 담겨있던 보루봉투에
모나미 153 볼펜으로 깨알같은 시를 쓰곤 했었다.

신월동 대여섯평 가겟방에서도
엄마는 외갓집 들의 풀을 보며, 꽃냄새를 맡으며
물에 발을 담그고, 바람을 느끼며
시를 쓰곤 했었다.

왕년에 문학 소녀였더란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돌아다니다 결국은 내버려지는
그 포장지 위 깨알시들이 아쉬웠는지
어느해 생일에는 아들에게 시를 쓸 노트를 사달랬었다.

자식들 필통속에
예쁜 볼펜, 볼펜똥 안나오는 펜을 샘 많은 아이처럼 가져가서는
내일엔 뚜껑 없이 들고 다녔고
글피엔 153 볼펜을 도로 쥐었다.

엄마는 지금도 시를 쓴다

시를 쓰라 사다준 노트엔 '강물이 흘러간다'
몇줄 유치한 시들이 채워지는가 싶더니
어느날부터 빼곡히 창세기 출애굽기 필사본이 채워져갔다.

인생에 몇번 모질지도 못했어서
엄마의 깨알시는 볼펜똥 묻어나는 싸구려 볼펜으로
이것저것 싸맸던 포장지 여백에만 쓰여졌었지만

예쁜 맘 간직하며 써내려간 50줄 깨알같은 날들은
이 세상 어느 시보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시가 되어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