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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8일 금요일

후회만 하는 남자 [해바라기

 

"내가 10년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는데

꼭 그렇게 다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태식이는 잃어버리고 후회하는 남자다.

 

잃어버리고 술 마시고,

잃어버리고 싸우고,

그리고 운다.

 

술도 안마시고, 싸우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10년을 후회해서

소박하지만 세상 그 누구의 것보다 소중한 행복을 얻었지만,

정작 그 행복을 지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태식이는 멍청하다.

멍청한건 나쁜거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니까, 멍청한 건 나쁜거란다.


대학 2학년때 난 이미 까맣게 잊은

미분과 적분을 태식이는 할 줄 알았지만,

분노할 줄도 알고, 싸울 줄도 알았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

 

그렇게 잃고

술을 마시고, 싸우고, 그리고 운다.

 

내가 가진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크레딧이 올라가는 사이,

내 옆의 이 사람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잠깐 떠올려보았다.

 

너무 많아서 태식이처럼 적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ㅇ 하나더 ㅇ---------

태식이의 행복이 언제 어떻게 위기를 맞게될지

그리고 태식이는 어떻게 분노하게될지

초조해하며 기다려야 했다.

 

단순한 스토리와 뻔한 결말의 한계다.

그 공허함을 메워준 건 김래원의 연기와

이것이었다..


퓨전소프트 ODD-I P11N

2006년 12월 1일 금요일

살아남기 위한 슬픈 투쟁[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투쟁은 생존이 위협받는 극단의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다.

 

"나부터 살고 보자"
값싸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투쟁에 관한 가장 진솔한 표현이다.

극단적인 투쟁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배고파 죽겠어서 하는 투쟁이다.

 

따라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건 사회적이건 어떠한 가치를 위한 투쟁에는
어떤 방식이든 협상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좌파의 투쟁이 사회주의 가치의 실현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존을 아젠다로 내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혁명 대오를 투쟁의 극한으로 몰기 위한 전략이었고
마르크스는 가치의 문제를 생존의 문제로 탈바꿈시키는데
꽤 과학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정치적인 투쟁도,
20세기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로맨틱한 투쟁도,
실패의 이유는 단 하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전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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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배경은 아일랜드 독립과정이다.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들의 의지와
그 과정에서 IRA의 역할과 성격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곳에는 생존을 위한 폭력이 있고
폭력적 대치는 외부와 내부를 가리지 않는다.
억압하는 세력에 의한 협박의 '두려움' 때문에
투쟁 조직을 밀고했던 어린 소년(크리스)을 처형하는 도입부와
조직내부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간의 대립으로
형(테디)이 동생(데미안)을 처형하는 결말이 맞물려 있다.

 

이렇듯 이 영화는 투쟁이란 것이 내가 살기 위한 처절하고도 슬픈,
하지만 비인간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극단적 행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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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할 것인가, 협상할 것인가
고집스러운 사회주의와 이중적인 민족주의간에
어느 한편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투쟁을 생존의 문제로 치환시킬 능력이 없는 지도부는
일찌감치 협상의 방안을 고민하는 편이 모두를 위해 낫겠다.

2006년 11월 28일 화요일

ENFP - 스파크형

 
 


 

ENFP는 무엇보다 순수하고 아이다운 유형이다.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변덕쟁이들이다

 

ENFP는 다른 친구들이 생각해 내지 못하거나 찾아내지 못하는 것도

 

기발하게 발견해 주변을 놀라게 한다

 

이런 일도 어떤 노력을 들이기보다는 한번에 알아 맞추듯이 아니면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이루어져 더욱 더 주변을 신기하게 만든다

 


ENFP는 누구와 같이 있느냐에 따라서 아주 말썽꾸러기가 될 수도 있고

 

조용한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이들은 마음에 맞는 친구나 선생님을 만나면 자신의 진가를 마음껏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너무도 평범 이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ENFP는 두루 친하게 지내지만 그 중에서도 꼭 자신과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는다

 

하루라도 그 친구가 결석하면 ENFP는 금방 외로움에 휩싸이고

 

기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음에 맞는 친구가 있다면 과 행동을 하기도하고 천방지축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감정이 풍부한 ENFP는 친구들과 잘 싸우고, 삐지고, 화해도 잘한다

 

이들은 무슨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신경질도 내고

 

화를 내는 듯 참을성이 부족한 면을 보여주지만 금방 돌아서서 사과하는 면도 있다

 

칭찬을 먹고사는 이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허용적인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모나 교사의 작은 칭찬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오며 더 잘 하려고 애쓴다

 



ESFP 친구들의 표정이 밝고 익살스러운데 비해 이들은 왠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표정으로 멍하게 보일 때가 많다

 

따라서 수업시간에 지적을 많이 받기도 한다

 

꾸중을 들을 때도 표정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을 때가 있어,

 

마치 이 상황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이 같을 때도 있다

 


ENFP는 억울한 것을 참지 못한다

 

억울하게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면 이들은 자신의 억울함이나 생각을 주장하기보다는

 

포기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선택해 다른 외향형에 비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학교에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깜깜할 때까지 학원과 집,

 

그리고 숙제도 잊어버리고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한 번 몰두하면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몰입형들이 많다

 



감수성이 풍부해 가슴아픈 노랫말에서도 코끝이 찡하고, 헤어지는 것을 무척이나 슬퍼하고,

 

때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을 앞의 친구에 대한 배신행위로까지 생각하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한 이들이지만 의외로 아주 관습적이고 보수적인 사고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즐거운 분위기에서는 참여자 이상의 기쁨을 느끼고

 

협동심이나 함께 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의 정서를 해치고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조직에서는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한다

 



ENFP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잔소리를 무엇보다 싫어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이 자유스럽기를 원하며,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성장하기를 원한다

 

준비물을 다 챙겨놓고도 잊어버리고 가지고 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시험에서는 아는 문제를 건성으로 읽고 틀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쉬운 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어려운 것을 너무 쉽게 단순화해버리는 경우가 있으며,

 

자신의 능력에 비해서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답습하고 연습하는 과정을 싫어하는 이들은 수학의 계산 과정을 생략해서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일기를 매일 쓰는 것을 힘들어하고 잘 쓰지 않으면서도 일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중요하다고 말한다

 

 

2006년 11월 23일 목요일

엘리자베스타운 [051122]

 

 

 

 

우리 둘간의 관계를 성공적이게 하기 위한

그녀의 제안은 '천천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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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를 향해 길을 나선 사람에게 필요한 몇가지가 있다.

 

도보를 포함한.. 교통수단과

머릿속에 존재하던, 손에 들던.. 경로가 그려진 지도

나 자신이던, 가슴속에 담아둔 사람이던,

옆에서 나란히 걸어주던.. 그 길에 함께 해줄 길동무

 

물론 이 모든게 없어도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기에 "인생에 정답은 없다" 라고 하지 않던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어떤 종류의, 어떤 사람과의 여행이었던

그건 그리 중요치 않을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와 그녀에게 동일하게 물어져야 하는 질문은

그 목적지에 관한 것이다.

 

그녀의 제안대로 천천히 편하게 가다보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하게 될까?

 

그녀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그려진

이 지도를 내게 건넨 것일까?

 

다음에 시간 되면 한번 물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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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틴 던스트가 아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영화에서

그녀의 매력을 발견하기 보다

나이가 들면서 별로 예쁘지 않게 변해가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실망감..  

 

 

 

 

2006년 11월 22일 수요일

연애, 거 참..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제목을 차용한만큼


뭔가 거창한 걸 던져줘야 쿤데라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연애가 가볍다라고 하는 표현한 것은


'연애'라는 개념을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존재체를 가진 형이하학적인 것,


즉, '연애'에 유물론적 해석을 도입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영혼의 존재를 규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 무게에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 연애라는 개념의 유물론적 시각으로 돌아와서,

 

그것은 인간 활동의 산물이고,

 

인간이 상대 인간을 대상으로 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여타 노동과 차별성을 지닌다.

 

 

 

그 때문에 작용과 역동적인 반작용,

 

무한한 조합의 가능성이

 

연애라는 인간 활동의 가장 큰 특징이다.

 

 

 

각각의 조합은 각기 특징적인 성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떤 조합은 가볍고, 어떤 조합은 무겁고,

 

또 어떤 것은 딱딱하고 어떤 것은 부드럽다.

 

늘 지지고 볶지만

 

알콩달콩한 것으로 요약되기도 하고,

 

늘 지지고 볶고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요약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연애라 부른다.

 

그리고 화학실습처럼 정해져 있지 않은 결과가

 

우리를 늘 기대하게 한다.

 

 

 

전 상무에게 두들겨 맞은 영운을 구하려고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운 뒤

 

연아가 잠든 영운을 향해 묻는다.

 

"넌 나한테 뭐니?" 

 

 

 

그리고 난 너에게, 우리에게 이 연애는 뭐니?

 

아직 모르기 때문에 기대해도 좋다.

 

영화의 영어제목처럼 between love and hate

 

그 어디쯤에 답이 있겠지..

 

 

 

펼쳐두기..


 

2006년 11월 2일 목요일

야수와 미녀 [051029]

 
 


류승범의 영화는 설명이 필요없다.

꼭 보시게 ^^

 

특히

품행제로, 아라한 등을 질리도록 다시 보는

나와 같은 정신세계를 가진 분들은 서두르시게 ^^

 

 
 

홍감독의 대중화 전략 [해변의 여인]

 

 

극중 김중래 감독이 말하는

'기적에 관하여'란 시나리오는 대략 이렇다.

 

한 사내가 호텔 방에서 CD 플레이어로 모짜르트의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이 안에서도 똑같은 곡을 듣게된다. 그리고 호텔에서 나와  마임을 공연중인 삐에로를 보게 되는데 이때도 역시 같은 곡을 듣게된다.

그 사내는 이 놀라운 우연의 일치속에 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사에 착수한다. 삐에로에 대해, 그리고 엘리베이터 설계자에 대해, 음악이 만들어진 배경 등등.

그리고 마침내 그 비밀들이 하얀 실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 똘아이는 도처에 널렸다.

똘아이는 집착한다.
똘아이는 뭔가 뒤틀린 심사를 갖고 툭툭 세상을 향해 시비를 건다.
홍상수 감독이 그려낸 구조속에서
똘아이들은 각자 모난 한 축씩을 맡고 있다.

종업원에게 사과하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김태우,
잤니 안잤니, 나를 넘어갔니 안넘어갔니 역시 악다구니.. 고현정,
섹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싸우고 있다는 김승우,

 

극이 진행되면서 이런 모난 축들로 구성된

불편한 구조에 관객은 차츰 익숙해진다.

따지고 보면 모두 모나고 내면에

한 꾸러미씩의 집착 대상을 품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슬그머니 나의 모난 모습도

그 구조속에 끼워넣어 봄직도 하다.

 

2. 지루한 영화에 대한 변명

홍상수는 구조로 말하는 이야기꾼이다.
따라서 감독이 자신이 만든 구조를 이해시키지 못할 때
영화는 지루해진다.

이 영화가 홍상수가 만든 가장 대중적 영화라고

평가받았던 데에는 고현정과 김승우처럼

대중에게 친숙한 배우들을 캐스팅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감독이 자신이 가진 구조로서의 영화관을

아예 극중 감독인 김승우를 통해 까놓고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구조로서의 시나리오가 위에서 언급된 '기적에 관하여'다.

영화속에서 주목받는 특징적인 일상은 한 셋트의 구조이다.

감독은 그 비밀을 영화 밑바탕에 슬그머니 감춰두고

관객에게 그 구조에 바탕한 스토리를 제공한다.

 

관객이 스토리에 내재된 하얀 실의 정체를

발견하는 일은 '기적'과도 같다.

홍상수 감독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기적을 포기하고,

연습장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신의 구조를 설명한다.

기어이 관객을 이해시키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홍감독.. 안습이다.

 

3. 연애.. 로맨스.. 그 실체는 창피하다.

수컷이란 표현이 처음으로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어릴적 읽었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통해서였다.
(주로 한국 남자가) 규범적인 껍데기 속에 감추고 있는

비열한 성의식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홍상수의 영화에는 늘 섹스에 집착하는 수컷이 등장한다.

작품속에서 수컷의 뻔한 본심이 자기 성찰적으로 읽힐 때마다

당황스럽기까지 했지만, 이제는 무덤덤해졌다.

'저거 어떻게 자빠뜨리지..??'라는 고민에 솔직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연애의 실체에 대해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욕망으로서의 섹스와 목적으로서의 섹스를

구분하는 수고를 좀 해주자.
(이건 '연애의 목적'에 대한 리뷰에서도 잠깐 다루어본 바 있다.)
비록 결과적으로 같지 않냐는 질문에

한마디 반론도 제기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2006년 10월 27일 금요일

쉼표

 

 

가슴 속에 수없이 마침표를 찍으며
지금껏 살아오면서

마침표 찍는 일에 서툴렀음을 반성하면서

 

가벼운 문장 하나에도 마침표를 꼭 빼먹지 않고자
점검하는 일이 많아졌다.

 

가슴 속에 수없이 마침표를 찍어도
마쳐지지 못한 내 그리움에
눈물이 머금고 싹이 돋아

 

이제 쉼표가 된다.

 

 

 

나는 소통한다 [우행시] 2006년 9월 셋째주

 

 

공지영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나영의 낯설지 않은 연기와
강동원의 우물거리는 대사처리를 기대했고
영화를 통해 그것보다 꽤 괜찮은 감동까지 얻을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탓에 영화가 시작할 때서야
"이거 내용이 뭐야?"라고 녀석에게 물었다.
원작이 공지영의 소설이란다..  

 

1994 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가 출간됐던.. 대학 2학년때였다..
전대협이 한총련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전환되었고
학생운동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시각들이
줄을 이었다.

 

정치투쟁이 아닌 문화운동에서 해법을 찾는 시도가
시작된 것도 그때쯤이었고, 여성주의에 대한 반향도 시작되었다.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 역시
그러한 다양한 시도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게 '인간에 대한 예의'는 제도권으로 편입된
운동권 출신 이야기꾼의 넋두리일 뿐이었다.

 

2006 공지영

94년 이후 공지영 기피 습성을 지속해오던 내게
아주 우연히 '우행시'가 왔다.
인간 본질과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관계에 대한 탐닉
이라는 주제에 있어 공지영과 나는 원래 통하는게 많았다.

(여기에 한 사람 더.. 김윤아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인간에 대한 예의' 시절에도 그러했지만
당시의 나는 그 관계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길 고집했었다.

 

자아를 사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그래서 죽지 못해 사는 한 여자와 남자가 있다.
완전한 타인들간의 만남.
상대의 내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기까지에는 이렇듯

타인과의 소통이 전제되어야 했다.

 

우리는 소통한다.

딱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만한 이유도 없던 시간들..
딱히 죽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만한 이유도 없던 시간들..

 

죽는 것보다 용서가 더 힘들었다는
여자의 절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의 존재를 스스로 가볍게 여기는 정신병리학적 상태에서
이제 막 벗어나는 중이다.

나는 다시 소통한다.

 

하나더.

원작에서는 남자가 죽은 동생에 대해 갖는
미안함과 애착이 크게 두드러져 있고,
남자가 죽은 후에 남긴 슬픔과 감동이 훨씬 강하다고 한다.

공지영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이해한 것으로
원작의 감동을 대신한다.

 

하나더. 화목제

구약성서에서 화목제에 대한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원래는 유목민들간에 분쟁을 종식하는 제도가
신과 인간간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의 화해의 상징으로 동물의 피로
언약을 맺고 어쩌고..

여기서 의미하는 화해는, 권력적이고 남성적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굴종을 맹세하고 다시는 대들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하는 일종의 강화조약인 셈이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가 피를 흘림으로써
더이상 신과 인간간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간에
화목제는 필요가 없다.

여자가 절규하며 죽는 것보다 힘들었던
용서를 했다고 고백할 때,  

신약의 여성성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나더. 기억에 남는 대사 몇개

-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건 마법이고 마술이지,
  사람이 변하는게 기적이지.

- 애국가를 불렀는데도 무서워요.

- 나에게는 죽는 것보다 용서하는게 더 힘들었다는걸
  하나님을 만나서 얘기해주고 싶었거든.

2006년 10월 10일 화요일

0.242의 의미

 

북한의 핵실험

반기문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단독 추대

 

평소 꿈을 잘 남기지 않는 수면 습관임에도 불구하고

긴 연휴 막바지엔 갖가지 잡스런 꿈들로

현실과 공상을 구분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연휴의 주말을 넘긴 첫날

갑작스레 달라진 세상의 잰걸음을 뒤쫒다가

그나마 한숨 돌리며

변하지 않는 것도 있음에 안위할 수 있었던 건

 

시즌 타율 0.242 밖에 안되는 종범이 형이

준플레이오프에서 보여주신 화려한 개인기

 

서른 일곱(아름다운 소수군..)

그의 나이는 이제 숫자에 불과한 정도를 넘어섰다.

 

그러하기에 0.242 의 의미는 더욱 크다.  

그것은 프로의 생명을 지탱해준 기초대사량의 수치이다.

 

적어도 0.242 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프로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2006년 9월 15일 금요일

9월 13일 전문가 FGI 에 대한 평가

 

1. 공교롭게도 서른 세번째라서 더욱 의미가 있는 나의 생일에

야심한 시간까지 업무에 투입된 것은 결과적으로는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2. 열린우리당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청산되어야 한다"는 한 참가자의 발언에 모두들 경탄해 하면서도 굳이 반론을 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민주당은 '(새)천년'을, 열린우리당은 '백년(정당)'을 기약했었다.

어쩌면 현재의 열린우리당은 한 정당이 백년간 겪을 시련과 영광을 불과 3년만에 모두 겪었기 때문에 소멸되어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실험은 유효했다.

 

3.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민주/반민주, 민주/산업화, 개혁/보수

혹자는 서민과 부자의 경쟁구도로 모두 환원될 수 있다고도 했다.

과연 그런가? 아닌거 같은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지음 | 유나영 옮김
삼인
평점

지방선거 패배 이후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 및 당직자들의 필독서로 지정되었다는 이 책은, 공화당을 상대로 매번 쓴 잔을 들이키는 미국의 민주당에 대한 전략적 코맨트다.

 

그 핵심은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프레임을 변화시키거나

프레임에 일치하는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대중의 정체성에 부합하고 대중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진보진영은 -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진보진영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유효했는지 의심이 든다 - 프레임을 개발하고 개념을 창조하는데 장기간의 투자와 노력을 해야한다.  

레이코프는 대중이 진실이나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후보나 정당에 반드시 투표하지 않으며 따라서 진실이나 대중의 이익보다 프레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레이코프 자신에게 투자하라는 얘기인 듯.. ^^

 

우리에게는 '진정성'이라는 말로 요즘 자주 거론되는 목적론적 진실성과 방법론적 진실성에 대한 신념(또는 집착?)의 뿌리가 계몽주의에 있고 극복해야할 대상이라는 레이코프의 말이 인상적이다.

 

역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2006년 9월 1일 금요일

국제주의 이념과 운동

 

 
아래 글을 읽는 동안

얼마전 천 군으로부터 들었던 IS 애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강남역에서 만난 IS 애들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며 예전과 같은 방식과 열정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으며 솔직히 반가웠다.

 

무디의 말처럼 그것은 우리의 전망과 실천의 일부를 이루어야 한다.

일부라는 얘기는 중핵적 가치는 아니란 얘기다.

 

근데 이 글이 도대체 언제, 어디로부터 내게 왔는지 도통 기억이 없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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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투쟁들이 궁극적으로 일국적이거나 심지어 국지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곧 국제적인 연결, 조정, 조직체, 그리고 활동이 오늘날의 세계화된 국제 경제 하에서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의 성공에 관건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지구적 자본이 결국 어떻게든 억제[통제]되어야할 것이라면, 국제주의가 노조 지도자들, 활동가들, 조합원들의 전망과 실천의 일부를 이루어야만 한다."


 

국제주의 이념과 운동

 

 

 "Working TV"는 캐나다의 브리티쉬 콜럼비아에 위치한 지역 네트워크 방송국이다. 여기서 얼마전 제작하여 인터넷에 올려놓은 한 비디오 파일은 자못 인상적이었는데, "새로운 국제주의"라는 이름으로 각국의 메이데이 풍경을 27분짜리 클립으로 만든 것이었다.

 

남아공과 쿠바, 캐나다의 노동자들이 축제같은 집회를 열고 제 3세계의 아동착취 사업장(sweat shop)들을 규탄하는가하면 다자간투자협정(MAI)에 반대하는 결의를 제출했다. 화면은 바뀌어 후반부 1/3 가량은 서울의 메이메이에 할애되었다.

 

<철의 노동자>와 <단결투쟁가>가 울려퍼지는 집회 장면을 영어 나레이션으로 청취하는 기분은 묘하다. 한국의 활동가와 Working TV의 운영자인 줄리어스 피셔가 인터뷰를 나누고, 한국 노동자들의 상황과 요구가 소개되었다.

광고와 자막이 올라가면서 배경에 깔리는 화면은 '놀랍게도' 풍물패의 율동과 북소리이다.

 

이는 확실히 전례없는 관심을 반영한다. 서구의 연구자들과 저널리스트들은 사회운동의 동력을 간직하고 분출하는 새로운 지역으로 흔히 브라질, 남아공화국과 함께 남한을 거론한다. 걸맞지 않게 주목을 받고 있다는 작은 민망함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 하에서도 몇십만의 조직된 저항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운동역량을 보여준 나라는 달리 없었다. 그만큼 이 땅의 상황은 절박하면서도 세계적 수준에서도 '결정적'이다.

 

더우기 그 관심은 밖에서 안으로의 방향만이 아니다. 몇해 전 그린피스가 방한시위를 했을 때, 그 자체가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그런 '국제적' 운동들에 제법 익숙하다.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투쟁으로부터 영국의 리버풀 항만 노동자(Liverpool Dockers)와 프랑스의 실업자 운동, 그리고 최근의 호주 항만노조의 투쟁과 미국 GM사의 파업투쟁까지 다른 나라의 투쟁들이 우리의 직접적 관심권 안에 들어와 있다.

 

96-97년 총파업 당시 국제자유노련(ICFTU)의 간부를 위시한 여러 외국인들이 직접 명동성당까지 찾아와 연대의 힘을 실어준 이래, 우리는 타국의 노동자들에게도 지지서한 한통이라도 발송할 수 있는 발상(mind!)을 갖게 되었고, 뒤이어 닥친 IMF 사태는 그러한 외국의 사례들이 단지 이방인적 호기심의 대상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점을 여실히 깨닫게 만들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한국지부 같은 비정부기구들은 더욱 본격적인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영삼정부의 '세계화'가 실제로 가져온 것은 배낭여행 붐과 자본시장 개방 정도였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에 공감하고 저명한 대인지뢰 철폐 운동가의 방한을 반길 수 있는 '세계화'를 체험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자본은 하루에도 수백번 국경을 넘나들며 자신의 집행기구를 '지구화'하고 있는데 반해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주의는 오히려 맑스가 활동했던 제 1인터내셔널 시기보다 훨씬 후퇴했음을 지적한다. 미 상공회의소가 한국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증가시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고, IMF의 한국사무소가 구조조정 프로그램 시행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조지 소로스마저 대안적 국제 금융공사의 창설을 요구하고 있는 마당에, 예의 그 '국제주의'를 떠올려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관념들이 그러하듯, 국제주의 역시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개념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일제시기 사회운동에서는 훨씬 활발한 국제주의적 정서와 실천들이 있었다.

 

사회운동의 여러 지도자들이 일본과 러시아로 유학을 가거나(혹은 쫓겨가거나) 직접 국제회의들에 참여하기도 했고, 세계 운동의 동향에도 놀라울 정도로 정통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냉전의 벽--더우기 우리에게는 '분단'의 벽--과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만들어 놓은 장벽과 함께, 국가발전 이데올로기가 갖는 견인력은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좁혀놓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이번에 기획된 <주제>에서 우리는 국제주의 이념과 운동의 간략한 맥락과 함께 가능한 현실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60년대 신좌파운동 속에서 들끓었던 국제주의의 기운은 80년대의 후퇴와 함께 침잠해있었다.

 

대부분의 좌파정당들이 공언했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대개는 어떠한 실천도 동반하지 않는 오직 명목상의 것일 뿐이었다. 최근에 들어 국제주의 운동의 기운은 몇가지 수준에서 복원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0세기 이래 세계적 수준에서 국제주의의 물결은 몇번의 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러시아 혁명과 초기 코민테른의 시기, 스페인 내전 및 레지스탕스 운동, 60년대 반전평화운동, 최근의 국제적 노동운동 등.

 

물론 국제주의를 과장하는 위험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예컨대 만델(E. Mandel)은 기회있을 때 마다 "자본과 생산력의 국제화 수준이 높을수록 계급투쟁은 더욱 국제적인 것이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영국의 광부파업과 남아프리카의 폭동 및 폴란드 연대노조의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새로운 성명서를, 똑같이 '계급투쟁의 상승' 및 혁명세력에 유리한 전진의 모든 부분으로 간주하는 다소 환상적인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위험성은 실천에 있어서도 세계체제적 수준의 가능성만을 되뇌이는 월러스틴이나 기든스, 또는 막연한 대안적 국제규범을 기대하는 지구적 시민사회론자들에서도 또다른 형태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뭉크(R. Munck)는 계급투쟁은 여전히 특수한 역사에 종속된 우세한 민족적 토대를 가지고 있고, 때문에 '세계적 계급'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관념적인 추상화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투쟁의 접점이 어디서 형성되는가, 그리고 효과적인 반자본주의 투쟁이 결합될 수 있는 공간과 방향은 무엇이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가 자본에 의해 나타난 국제화를 재생산해야할 아무런 필연적 이유도 없을뿐더러, 새로운 가능성의 요소들을 전혀 무시할 필요도 없다. 킴 무디(Kim Moody)는 '국제적 사회운동적 조합주의(internaltional social-movement unionism)'라는 노동운동 내의 새로운 경향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투쟁들이 궁극적으로 일국적이거나 심지어 국지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곧 국제적인 연결, 조정, 조직체, 그리고 활동이 오늘날의 세계화된 국제 경제 하에서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의 성공에 관건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지구적 자본이 결국 어떻게든 억제[통제]되어야할 것이라면, 국제주의가 노조 지도자들, 활동가들, 조합원들의 전망과 실천의 일부를 이루어야만 한다."

무디가 보기에 '국제적 생산사슬'이야말로 초국적 기업들에 대처하는 다국적 전략을 발전시키는데 관건적인 요소이다. 핵심 장소에서의 국부적 파업들은 이들이 국제적 생산체계 전체나 혹은 그 일부를 폐쇄할 수 있는한, 이러한 전략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 노조들의 다국간 공동행동들은 최대규모의 초국적 기업까지도 주요 시장 내에서 불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생산의 사회화의 진전은 물론 이러한 여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동적'으로 국제적 계급실천을 낳지는 않는다. 이 역시 고도의 조직 수준과 단호한 지도력이 뒷받침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결국 국제적 공간에 무조건 긍정적 기대를 거는 것도, 지역적(일국적) 투쟁만을 능사로 생각하고 이를 방기하는 것도 모두 잘못된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개별 사업장의 단협조차도 IMF의 프로그램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OECD 내에서 밀실협상으로 이루어지던 다자간투자협정(MAI)의 예정된 진행일정을 파탄시킨 가장 큰 요인이, 어떤 활동가가 협상문서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각국에서 저항 행동들이 촉발된 것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고리들이 갖는 의의와 가능성들을 활용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는 아주 단순히, 시야를 넓히고 경험을 창출하자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제기가 다시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의식적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뭉크는 민족주의와 맑스주의 애증관계를 일별하면서 맑스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해석을 가하고 있다.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연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 위기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맑스주의 역시 도해법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측면에서도 그것은 현세적 종교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도, 비록 종교나 세습 군주에 대한 신앙보다는 과학적이라 할지라도 '고안된 전통'이다. 맑스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과학과 이성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아성이라는 고상한 지위로부터 폐기시키려 할 때, 그와 같은 것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대항헤게모니의 역사적 블록을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국제주의' 역시도 그 중요한 하나로 '고안'되고 교육되어야하는 전통이라는 것이다. 태극기를 흔들어대며 경제위기를 이겨내자는 민족주의 대신, 다른 나라 민중들의 투쟁에 박수를 보내고 우리나라 투쟁의 국제적 의의에 자부심을 갖는 가치관과 경험으로서의 국제주의가 일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당장은 이러한 것이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을 운위하기보다 앞서야할 실질적인 작업일 것이다.


처음에 실린 피터 워터만의 글, [1848년의 국제주의에서 1998년을 위한 국제주의로]는 맑스의 두 저작 {공산주의당 선언}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해 당대 국제주의의 내용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계급과 운동의 성격 변화 등, 이후 역사가 가져온 조건들의 변화는 이러한 내용의 적실성도 변화시켰다. 그렇다면 그러한 조건들에 기반한 새로운 방향이 타진되어야 한다. 워터만이 보기에 이에 대처하는 방식은 두가지이다.

 

낡은 관념의 깃발을 고수하는 측에 홉스봄이 있고, 이질성 증대라는 현상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국제주의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측에 E. P. 톰슨이 있다. 워터만은 작년 서울 국제노동미디어 행사에도 참여하여 적극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은 {공산주의당 선언} 150년 기념 파리 국제학술대회에도 기고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구화라는 현상이 가져온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계급투쟁의 전장이 과연 변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실린 글에서 엘렌 우드는 많은 논자들이 주장하는 국민국가의 소멸이나 생산의 세계화 정도는 대개 과장이며 투쟁은 여전히 일국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국경을 뛰어넘은 최근의 노동운동의 연대 사례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일까.

 

이에 대해 우드는 그러한 연대투쟁을 통합하는 원리는 단지 초국적기업에 대한 착취뿐만 아니라, 자본축적을 지속하는데 있어 특정 국민국가들이 행하는 '적극적'인 역할이었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지구화는 오히려 국민국가를 더욱 가시적인 투쟁의 타겟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IMF에 대한 재협상이나 반대투쟁은 신자유주의의 (수동적이기는커녕) 적극적이고 능동적 행위자인 국가 정책에 대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의 파니치의 글에서 더욱 포괄적으로 전개된다. 파니치는 지구화와 민족국가를 둘러싼 그간의 이론적 논쟁을 광범하게 검토한 후, 민족국가의 기능이 어떻게 (소멸이 아니라) 변화했는가를 논의한다. 특히 데이빗 헬드 식의 '지구적 시민사회론'이나 좌파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진보적 경쟁력 강화론'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다니엘 벤사이드의 글은 국내에도 상당히 알려진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글 [제 4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에 대한 논평이다. 사파티스타가 제기한 문제의 급진성이나 조직방식의 새로움은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실제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국제회합"으로의 조직화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벤사이드는 이를 단순히 찬미하거나 폄하하지 않고, 좌파의 새로운 국제주의의 일부로 자리매김될 수 있도록 적극적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평 이상의 독자적 함의를 담고 있는 글이다.

 

보편적 '국민의 재건설'이나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 것의 의미, 그리고 진지전과 직접공격에 대한 해석은 그람시를 급진적으로 전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최형익씨의 글은 8월 중순 서울대에서 개최되었던 제 6회 청년학생한마당의 국제연대 관련 토론회에서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간의 국내 국제연대 운동의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예컨대 민주노총의 5대 요구안 등을 매개로한 공세적인 전망을 갖는 국제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논의이다.

 

 

 

 

 

 

● 관련해서 읽기

임지현 편역, {민족문제와 마르크스주의자들}, 한겨레
임지현, [마르크스-엥겔스와 민족문제], {이론} 10호, 1994
- 그는 우리나라에서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민족문제에 관한 풍부한 논의거리를 제공하는 거의 독보적인 연구자이다. <지성과 패기>에 연재하던 '민족주의 기행문'이 얼마전에 "도서출판 강"에서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로 묶여져 나왔다. 이 책은 고전 사회학자로부터 맑스와 엥겔스, 최근의 좌파 논자들에 이르기까지 민족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담고있는 문헌선이다(앞의 책은 절판된듯하다).
 
로날도 뭉크, 이원태 역,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문제}, 민글, 1993
- 뭉크(Ronaldo Munck)는 아르헨티나 출생의 사회학자로 라틴아메리카의 종속과 변혁에 관한 많은 연구를 해 왔다. 이 책은 카우츠키나 레닌, 스탈린부터 게바라 등 국제적 사회주의 운동에서 실제로 민족문제가 어떻게 취급되고 실천에서 굴절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민족주의의 속성을 규정하기 위한 두가지 기준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것의 관계'와 '제국주의에 대한 관계'에 있다는 규정은 명쾌하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현대 자본주의와 민족문제}, 갈무리
- 영국 트로츠키주의의 다른 분파들끼리 주고받은 민족문제에 관한 논쟁. 자본의 국제화 속에서 민족국가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부제로 달고 있지만, '원칙'의 확인 이상으로 진전하기 위한 정치적 함의를 추출해 내기는 어렵다.
 
"주제 :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역사", {이론} 3호, 1992년 겨울 中.
  정운영, [제 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의 투쟁]
  강신준, [제 2인터내셔널 시기의 마르크스주의]
  김세균, [제 3인터내셔널 운동과 마르크스주의]
 - 인터내셔널의 역사에 대한 친절한 해설 자료. 운동의 상황들과 주요 논쟁들, 이론적 이슈들이 함께 논의된다.
 
에릭 리, {노동운동과 인터넷}, 한울 (근간)
-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인터넷 활용을 논의한 책. 국제주의적 운동의 가능성들에 관하여, 기술적 측면 이상의 풍부한 논의들을 담고 있다.
 
윤근식 외 역, {맑스주의와 민주주의}, 성대 출판부 中,
 요아힘 히르쉬, [정치적 전망: 경쟁국가를 지양하는 민주주의],
 볼프-디터 나르, 롤란트 로트,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 국제주의 및 유럽통합에 대한 독일 좌파의 입장을 알 수 있다. 특히 사회주의적 세계연방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기획 : 지구화의 문제설정", 서울대학원 자치회, {반시대} 창간호, 새물결, 1994 中,
 이호근, [지구화, 유럽통합, 그리고 독일통일 이후]
 박복영, [자본국제화에 관한 몇가지 정치경제학적 문제]
 이왕휘, [지구화 논의의 쟁점과 전망]
 - 지구화(globalization) 논의가 시작될 무렵 마련된 소장 연구자들의 기획. 그러나 서구의 논의들을 제법 풍부하게 검토하고 있다. 글 마다 상당한 시각 차이가 있는데, 박복영은 파니치와 가깝고, 이왕휘는 기든스 및 헬드와 유사한 편이다.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편, {신자유주의와 세계 민중운동}, 한울
-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선별하여 편역한, IMF 구제금융 이래 가장 '시기적절한' 책이었을 것이다. 특히 2부 "세계 민중의 저항: 투쟁과 전략"은 우리를 시야를 넓혀주기 충분한 자극이 된다.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 [방문단체 총괄보고서], 지식인연대 편, {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문화과학사
- PICIS 활동가들이 작성한 유럽 좌파운동 방문기. 버전-업을 기대한다.
 

 

 

2006년 8월 22일 화요일

"당신이 괴물이지!?" [괴물]

 

 

한국 영화 1,000만 시대가 된지도 오래지만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폭된만큼

영화의 메세지 자체가 이슈가 되는 일은 드물다.

물론, 1,000만이나 공감한 영화를 놓고

내용이 어떻느니 배우가 어떻느니

왈가왈부하는 일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나마 괴물이 스크린쿼터에 대한

공론이라도 형성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영화 '괴물'에 등장하는 3가지 괴물

 

(굳이 3가지로 정리한 것은 최근 매경에서 기획 및 프리젠테이션 강좌를 다녀와서 문제를 3가지로 정리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괴물 : 사전적 정의 : 정체불명의 생물·물체로 특히 추악·불쾌·공포 등의 느낌을 주는 존재의 총칭. 기형의 의미로도 쓰인다.

 

괴물 : 조작적 정의 : 심리적 육체적 위협의 가능성을 내포한 유형 무형의 낯선 존재

 

 

첫번째 괴물, 한강에 괴생물체가 나타났다.

미군 기지에서 버린 포름알데히드가

원인일 것으로 추정되나 확인한바 않음.

 

생태계에서 변이가 발생할 확률은

환경의 변화 속도와 강한 비례관계에 있다.

영화는 인간이 야기한 환경 오염이 자연상태에서보다

급격하고 빈번한 환경의 변화를 유발시켜

돌연변이의 발생 가능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전제하고 있다. 
 

 

두번째 괴물, 배급력, 이쯤되면 위협적이다.  

스크린쿼터와

김기덕의 이야기를 아니할 수가 없다.

 

어제 김기덕의 사과로

'괴물'의 혐의가 벗어졌다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인간들이 있지만,

 

600여개의 개봉관을 점유한

괴물의 실체를 눈앞에 두고

 

소위 네티즌이라 일컬어지는

'집단광기 상태에 쉽게 빠지는 비논리적이고

편협한 사고의 인간형 집단'을 앞세워

눈 가리고 '아웅'하는 형국이다.

 

(참고로 위의 인간형 집단이 처음이 등장했을때는 STRANGE 했지만 위협적이기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기에 괴물로 불려지지 않았지만 점차 위협적인 존재(괴물)로 돌변해갔고, 현재도 여전히 위협적이긴 하지만 NOT STRANGE하기에 더이상은 괴물로 정의할 수 없다.)

 

 

세번째 괴물, 봉준호의 시대인식.
봉준호의 시대인식은 과거

우리의 대학이 이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시대인식에 다름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들로 돌아가 볼까?

'플란더스의 개'에서는

대학의 교수직에 인생을 건

시간 강사가 등장하고 그의 삶에서의

작은 에피소드가 모두가 공감할만한

픽션으로 재탄생된다.

 

여기서 대한민국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고

주인공들은 맨몸을 던져 부조리에 (소극적으로) 저항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순응하고 이 세계를 조롱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우리의 기억속에 있는

화성에서의 연쇄살인 사건을 다뤘다.

해가 지고 나면 부녀자들이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던 공포의 시절을

봉준호는 과거 우리 대학이 가르친

시대인식 방법으로 추억한다.

그러는 사이 천박한 국가 권력이 빚어낸

심각한 아이러니는 웃음을 자아내는 넌센스로 탈바꿈하고

주인공들과 함께 용의자를 진범으로 몰아간

관객의 눈앞에 미국에서 날아온 문서 한장을 들이밀며

관객을 조롱한다.

 

마지막으로 '괴물'에서는

봉준호의 시대인식에 존재하는 모티브들이

'상징의 기법'으로 영화 속에서 '괴물'로 되살아 난다.

 

국가권력은 여전히 아이러니하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모든 변수들에 우선하는 최상위 변수이다.

정말 그런가?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와 한국사회를 둘러싼 조건들은

전혀 변한 것이 없고,

여전히 국가, 권력, 미국이라는 주제가

우리의 시대를 규정하는 전부라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시대를 인식하는 눈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가 짊어져야 할 과제와

그 과제를 풀 수 있는 처방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시대인식은 이렇듯 전혀 낯설지 않다.
영화학교 시절부터 주목을 받으며

우리 영화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영향력을 인정받는

감독 봉준호의 시대인식이 이렇듯

전혀 변함없이 대학생 봉준호의 시대인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 자체로

STRANGE한 현상이다.

 

나아가 이것은

봉준호의 앞으로의 영화세계를 위협함은 물론,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하는 메세지를

논란의 여지없이 수용하는

1,000만 중 대다수의 행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위협적이다. 

 

부디 봉준호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는

대학을 떠난 봉준호를 만나고 싶다.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 [전차남]

 

 

가파름과 완만함이 반복되는

계단에도 비유하지만,
전차남이 그려내는 삶은

아주 많은 문들을 가진 미로에 어울릴 것 같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고,

때로는 문을 닫고 나와

다른 문을 향해 걸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인생에는

메트릭스 2편에서 등장했던 Keyman과 같이

올바른 문으로 인도해

그 문에 맞는 열쇠를 찾아 열어주기까지 하는

전능한 조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처럼

나의 친구들은 모니터 저편에 있고,

지하철 선로 반대편에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의 고백을 따라하게 된다.
"나도 두려웠단 말이다. 너만큼"

 

내가 그 사람을 행복하지 못하게 할까 두려웠고,

그 사람이 언제까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할까 두려웠고,
그러다가 그 사람이 떠날까 두려웠고,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

오랫동안 아파하고 힘들어할 내가 두려웠다.

 

그리고 난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그 공포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나 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2006년 7월 30일 일요일

2006.07.30

 

 

신의 전령을 자임하는 자들의 노력에 비하면

신은 정말 게으르다

 

 

2006년 7월 28일 금요일

Crash [2006년 7월 세째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습성들이 있다.

고양이와 개는 앙숙이고
원숭이는 물을 싫어한다.


한국인과 일본인,
영국인과 독일인은 전통의 숙적이고,
미국사회에서 흑인은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를 제외하면 대부분 밑바닥 인생이다.

영화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습성들의
예외적 상황들을 담아내고 있다.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어미를 잃은 고양이와 자식을 잃은 개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감동의 이야기처럼,
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떠나간 연인이 돌아오는 이야기처럼.

영화속 인물들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틀의 시간동안
관계속에서 서로 부딪혀가며

관계적 습성들과 상반된 경험들을 하게된다.

영화를 통해 일순간일지라도 확신하게 되는 긍정의 힘,
개연성에 대한 의심을 전혀 일으킬 수 없을만큼

완벽하게 구성된 픽션
이것들이 영화가 주는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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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드밀 위에서 시속 4Km의 속력으로 느끼는
영화의 감동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또 하나,

영화의 제목 'crash'와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에 사용되는
'clash'는 다음과 같이 다르다.

clash : 충돌이라는 표현으로도 쓰지만 보통 추상적인 것에 적용.
예를 들어, 의견의 충돌이라든지, 옷을 못 입었을 때 색깔의 충돌이라든지..
crash : 큰 물체간에 또는 사람이 something or someone에 물리적으로 충돌한 경우

2006년 7월 26일 수요일

이온 플럭스&울트라 바이올렛 [2006년 7월 둘째주]

 

 

다음 괄호안에 알맞은 단어를 채워넣으시오.

인류 - 미래 - 질병 - 치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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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뜬금없나? 그럼 이건 어떤가?

다음의 괄호안에 공통된 한 단어를 채워넣으시오.

인류 - 미래 - 기아 - 식량 - (    )
인류 - 미래 - 에너지 고갈 - 석유 - (    )
인류 - 미래 - 기상이변 - shelter - (    )
인류 - 미래 - 해수범람 - 육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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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바이올렛'과 '이온 플럭스'
이 두 영화의 공통된 모티브는

1. 인류는 질병으로 인해 위기를 맞을 것이다.
2.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집단이 권력을 갖게 된다.
3. 그 권력의 속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4. 그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우리 주변에 늘 있어왔던 것들이고
그것은 권력의 문제를 야기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난 주저함없이

Alocation of Scarce Resources를 말한

David Easton 아저씨를 '정치학의 형'뻘은 될만한 학자로

평가하고 싶은거다.

 

영화속에서 표현되는 권력의 속성이 선과 악을 넘나들고,

주인공 역시 자신이 속한 집단과 자신의 속성에 대해

고민을 하게되는 일이 빈번해지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실존에 대한 19세기의 질문으로의 회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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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음과 같은 예외도 있다.

 

인류 - 미래 - 외계인 - 협상 - ( 미국 )
인류 - 미래 - 외계인 - 대항 - ( 미국 )

 

이래서.. 미국은

절대 놓을 수 없는 우리의 우방이어야 한다.

 

외계인이 침략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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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된 모티브가 또 있다.. 인류의 운명은 여자와 아이(출산)에 달려있다.

인류는 다시 모계사회를 지향해가고 있다.

 

 

2006년 7월 16일 일요일

왕의 남자 [2006.07 첫째주]

 

 

『패황후 공비애사』.. 연산의 어머니 패비윤씨에 대해 기록된 책..

을 넘겨받고 갈등하는 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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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광대들의 불행은

누군가를 웃겨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왕을 가지고 놀때만 해도

크게 한번 놀고 배불리먹자는 의도였지만,

 

곤장을 덜 맞기 위해
왕의 앞에서 왕을 웃게 해야 했고,
신하들을 가지고 놀면
신하들이 웃을까 해서 그리 했지만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어 간다.

 

"이 책대로 놀면 누가 웃는 겁니까"

 

장생(감우성)의 물음에 처선(장항선)이 답한다.


"왕의 광대들이니까 왕을 웃겨야지."

 

두 사람간의 이 대화를 통해
영화 전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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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대 이야기의 소재는

아이러니한 상황 연출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자아낸다.

영화 선물에서 아내를 위한
눈물의 개그 연기를 했던 이정재의 경우처럼
광대라는 존재가 갖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행동은
자아와 충돌하고 왜곡되어 표현됨으로써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관객이 동의하게끔 만든다.

 

2. 극을 통해 관객이 연산이라는 인물에 대해
논리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던 정보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성애와 정신이상의 성향을 갖게된 폭군"이었지만,
이 정보들은 정서적 정화 과정을 거쳐
"인간적 고뇌를 가진 불행한 왕"으로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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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길게는 얘기할 거 없고
영화 밖에서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해방 이후 전현직 정치인을 통틀어
정서적 정화 과정을 거쳐

정치인에서 인간으로 거듭난 대표적인 사례가

노무현과 박정희에게서 발견된다.


갈등의 골이 깊어가는 이유는

이 두 정치인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

두 개의 그룹이 교집합이 공집합인 상태에서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그룹 중 한쪽이 웃으면 다른 쪽에선 시련이 된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므로

문제상황인양 확대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냥 재미있게 관람하면 된다.

 

극에 몰입한 나머지 연산처럼

극중에 뛰어들면 미친거다.

 

 

2006년 7월 5일 수요일

하프라이트 [2006.06 마지막주]

 

 


 

반전 스릴러를 만들어야 한다는

로젠버그 감독의 강박증이 영화를 훼손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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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사고로 우주와 지구의 탄생으로까지

사고를 확대했던 그가 결국 풀 수 없었던 문제는

최초의 기원이었다.

 

우주를 생성시킨 최초의 먼지 한 알갱이는 어디에서 왔으며

그것은 어떻게 운동을 시작했는지

 

그가 택한 결론은 먼지 이전에 누군가 있었고

그가 그 먼지를 건드렸다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했던 사고의 한계가

결국 '헤겔의 관념론'과

'독일의 유신론적 관념철학'의 탄생 배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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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10년도 더 된 철학 세미나를

떠올렸던 이유는

로젠버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완성도가 떨어지는 구성상의 허점을

이렇듯 관념론적 허상들로 채우기를 강요당했기 때문이었다.

 

죽은 앵거스의 존재, 죽은 토마스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서스펜스의 가치는 하락되고

반전을 위한 모든 복선들은 억지가 되어버렸다.  

 

하나 더) 어쩌다가 데미무어의 아들 이름은 토마스일까..

박준형.. 개콘.. 토마스 이리 오렴 --;;

 

하나 더) 우리나라 휴대폰이 세계시장에서 주목받고 나서부터

영화상의 휴대폰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데미무어가 쓰는 폰은 애니콜 슬라이드 e170 '일명 애슬이'

6개월만에 잃어버린 나도 옛날 폰^^

 

 

2006년 7월 1일 토요일

16 Blocks [2006.06 마지막주]

 
 


베리 화이트가 타이어 도둑이었음을 말해주기 위해

에디는 인질들이 모두 빠져나간 버스로 되돌아온다.

(덩치가 산만해가지고는 고작 타이어 도둑이었다니..)


베리 화이트뿐만 아니라..

개과천선한 스타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people can change를 주장하는 에디.

증언을 위해 감수했던 생사의 고비들을 방금 빠져나와

상황 끝~ 을 향해 치닫던 스토리는

에디의 위험한 귀환으로 급반전한다.

 

죄인들을 수없이 다루어 온 베테랑 형사 잭에게

people can change를 증명해보이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는 그것이 삶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로 진실에 집착해 어리석은 짓들을 감행한다.

할 말을 다못하면 눈물이 난다는 이문세의 노래에서처럼,
영화 '강력3반'에서 강아지 뺑소니범을 검거하기 위해

범죄조직의 중심부로 뛰어든 남상미처럼,
독일 월드컵 스위스전에서의 석연찮은 판정에

FIFA 게시판을 찾은 한국의 네티즌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구상에서의 삶의 진실은,

진실에 집착하고 다가갈수록,

그것은 다가간만큼 멀어져 간다는 것이다.

 

손 끝에서 맛본 찰나의 진실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 감상포인트)

영화 '사선에서'의 클린트이스트 우드의 연기를 연상시키는

원로 배우 브루스 윌리스

 

 

2006년 6월 17일 토요일

오만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말 최고 시청률의 드라마
지지고 볶는 캐릭터들의 모진 삶
딱하다 못해 여간 불편하다
여간 불편한 나의 삶

 

불현듯 난 내 운을 점치기위해
주사위나 동전 대신 핸드폰을 붙잡았다

 

담배 한 개피
맥주 한 캔
그리고 오만함
오만한 핸드폰

 

딱 한번만 그 오만함으로
내 운을 점쳐볼까
어차피 너를 가지지 않을거라면 

이렇듯 말을 아껴 너를 가질 수 없었더라면

 

 

2006년 5월 26일 금요일

꽃잎


 

설령
당신의 사랑을 얻기에
내가 가진 결함이
백가지, 천가지나 있다손 치더라도

 

당신은 내게
백번, 천번의 미안함으로도
갚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너무 흔한 당신의 이름이
플래시처럼 번뜩여
울컥 숨이 멎고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내맘 어찌할 수 없는 만큼
어찌할 수 없는 당신 맘 이해하기에
나는 이를 좌절감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지나 온 봄 지는 꽃잎에
마음이 쓰여 잠시 걸음을 멈춘 자리에서
이제 그만 흩어지렵니다.

 

 

2006년 4월 7일 금요일

버스를 타고 오면 돼

 

 

 

버스를 타고 오면 돼.
지하철보다 한 이십분 오래 걸릴테지만
내가 이십분 더 기다리지머.

 

지하철 타는 걸 싫어했었지?
에스컬레이터 없는 계단
땀냄새 흥건한 지하철 손잡이와
갱도를 메우는 새까만 굉음

 

간밤에 잠을 설쳤다면
차창을 조금 열고 눈을 감아봐
눈꺼풀을 떨구고 고개를 파묻고 ZZZ

 

밤꽃냄새가 코를 간질어 눈을 떴거든
10분도 채 남지 않았어

 

내게 전화를 걸어
전화기 든 손을 창밖에 내밀어 봐
부릉부릉 엔진소리를 타고
바람처럼 내게 날아와

 

너를 마중 가는 길에 난
햇살좋은 거리를 활보하는
예쁜 아가씨들에 눈길도 안줄거야

 

매일 퇴근길에 날 유혹하는
오뎅가판에 적당히 불은 오뎅에도
벌겋게 익은 잘난 떡볶이에도
구수한 김이 어깨를 감싸안는 순대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거야

 

네게 곧장 가는거야

 

내게 오는 날엔
넌 아마 그렇게 오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