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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22일 화요일

"당신이 괴물이지!?" [괴물]

 

 

한국 영화 1,000만 시대가 된지도 오래지만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폭된만큼

영화의 메세지 자체가 이슈가 되는 일은 드물다.

물론, 1,000만이나 공감한 영화를 놓고

내용이 어떻느니 배우가 어떻느니

왈가왈부하는 일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나마 괴물이 스크린쿼터에 대한

공론이라도 형성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영화 '괴물'에 등장하는 3가지 괴물

 

(굳이 3가지로 정리한 것은 최근 매경에서 기획 및 프리젠테이션 강좌를 다녀와서 문제를 3가지로 정리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괴물 : 사전적 정의 : 정체불명의 생물·물체로 특히 추악·불쾌·공포 등의 느낌을 주는 존재의 총칭. 기형의 의미로도 쓰인다.

 

괴물 : 조작적 정의 : 심리적 육체적 위협의 가능성을 내포한 유형 무형의 낯선 존재

 

 

첫번째 괴물, 한강에 괴생물체가 나타났다.

미군 기지에서 버린 포름알데히드가

원인일 것으로 추정되나 확인한바 않음.

 

생태계에서 변이가 발생할 확률은

환경의 변화 속도와 강한 비례관계에 있다.

영화는 인간이 야기한 환경 오염이 자연상태에서보다

급격하고 빈번한 환경의 변화를 유발시켜

돌연변이의 발생 가능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전제하고 있다. 
 

 

두번째 괴물, 배급력, 이쯤되면 위협적이다.  

스크린쿼터와

김기덕의 이야기를 아니할 수가 없다.

 

어제 김기덕의 사과로

'괴물'의 혐의가 벗어졌다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인간들이 있지만,

 

600여개의 개봉관을 점유한

괴물의 실체를 눈앞에 두고

 

소위 네티즌이라 일컬어지는

'집단광기 상태에 쉽게 빠지는 비논리적이고

편협한 사고의 인간형 집단'을 앞세워

눈 가리고 '아웅'하는 형국이다.

 

(참고로 위의 인간형 집단이 처음이 등장했을때는 STRANGE 했지만 위협적이기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기에 괴물로 불려지지 않았지만 점차 위협적인 존재(괴물)로 돌변해갔고, 현재도 여전히 위협적이긴 하지만 NOT STRANGE하기에 더이상은 괴물로 정의할 수 없다.)

 

 

세번째 괴물, 봉준호의 시대인식.
봉준호의 시대인식은 과거

우리의 대학이 이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시대인식에 다름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들로 돌아가 볼까?

'플란더스의 개'에서는

대학의 교수직에 인생을 건

시간 강사가 등장하고 그의 삶에서의

작은 에피소드가 모두가 공감할만한

픽션으로 재탄생된다.

 

여기서 대한민국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고

주인공들은 맨몸을 던져 부조리에 (소극적으로) 저항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순응하고 이 세계를 조롱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우리의 기억속에 있는

화성에서의 연쇄살인 사건을 다뤘다.

해가 지고 나면 부녀자들이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던 공포의 시절을

봉준호는 과거 우리 대학이 가르친

시대인식 방법으로 추억한다.

그러는 사이 천박한 국가 권력이 빚어낸

심각한 아이러니는 웃음을 자아내는 넌센스로 탈바꿈하고

주인공들과 함께 용의자를 진범으로 몰아간

관객의 눈앞에 미국에서 날아온 문서 한장을 들이밀며

관객을 조롱한다.

 

마지막으로 '괴물'에서는

봉준호의 시대인식에 존재하는 모티브들이

'상징의 기법'으로 영화 속에서 '괴물'로 되살아 난다.

 

국가권력은 여전히 아이러니하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모든 변수들에 우선하는 최상위 변수이다.

정말 그런가?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와 한국사회를 둘러싼 조건들은

전혀 변한 것이 없고,

여전히 국가, 권력, 미국이라는 주제가

우리의 시대를 규정하는 전부라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시대를 인식하는 눈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가 짊어져야 할 과제와

그 과제를 풀 수 있는 처방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시대인식은 이렇듯 전혀 낯설지 않다.
영화학교 시절부터 주목을 받으며

우리 영화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영향력을 인정받는

감독 봉준호의 시대인식이 이렇듯

전혀 변함없이 대학생 봉준호의 시대인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 자체로

STRANGE한 현상이다.

 

나아가 이것은

봉준호의 앞으로의 영화세계를 위협함은 물론,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하는 메세지를

논란의 여지없이 수용하는

1,000만 중 대다수의 행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위협적이다. 

 

부디 봉준호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는

대학을 떠난 봉준호를 만나고 싶다.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 [전차남]

 

 

가파름과 완만함이 반복되는

계단에도 비유하지만,
전차남이 그려내는 삶은

아주 많은 문들을 가진 미로에 어울릴 것 같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고,

때로는 문을 닫고 나와

다른 문을 향해 걸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인생에는

메트릭스 2편에서 등장했던 Keyman과 같이

올바른 문으로 인도해

그 문에 맞는 열쇠를 찾아 열어주기까지 하는

전능한 조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처럼

나의 친구들은 모니터 저편에 있고,

지하철 선로 반대편에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의 고백을 따라하게 된다.
"나도 두려웠단 말이다. 너만큼"

 

내가 그 사람을 행복하지 못하게 할까 두려웠고,

그 사람이 언제까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할까 두려웠고,
그러다가 그 사람이 떠날까 두려웠고,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

오랫동안 아파하고 힘들어할 내가 두려웠다.

 

그리고 난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그 공포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나 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