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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7일 수요일

Prime number

퇴근길에 차량넘버 7207이 문득 눈에 띄기에, 
과거에 다니던 회사 전화번호가 떠올라 "7207 7208 ..." 이라고 트윗에 읇조렸다
아마 그저께쯤 일이었나?

오늘 아침 트윗 멘션에 이런 멘션이 있는게 아닌가..

"7207 is the 920th prime number. RT @thehyan: 7207 7208 ..."

멘션한 이를 보니, PNbot 이란다. 아래는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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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e Number Bot
@PNbot view full profile →
JAPAN
Prime number counter. Reply with primality test.
http://www.google.com/crisisresponse/japanquake20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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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소수'(素數)라고 하는 Prime number는, 
1보다 큰 자연수로서 1과 그 수 자체 외의 약수를 가지지 않는 수.
예를 들면 2, 3, 5, 7, 11 등을 일컫는다.
(소수에 관한 더 흥미로운 설명은 http://www.scienceall.com/dictionary/dictionary.sca?todo=scienceTermsView&classid=&articleid=252588&bbsid=619&popissue= 링크 참조)

7207 만큼 큰 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37을 유독 사랑하고, 
17과 31 을 사랑하고, 그 외의 모든 소수들을 또한 사랑한다.

소수들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이, 도도한 매력이 있다.

블랙수트치마와 흰색 블라우스를 차려입은 커리어우먼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침대 발치에 몸을 웅크린, 자폐증상을 앓는 눈이 큰 소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앙칼진 교성을 내뱉는 고양이의 수염이 떠오를 때도 있고,
파카글라스에 담긴 얼음 띄운 드라이진이 떠올라 입맛을 다실 때도 있다.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감명깊게 기억하는 이유도, 
야구 이야기가 소재에 포함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수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유독 수학에 취약했음에도 소수에 대한 이런 사랑은
중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이자 수학선생님이셨던
이창대 선생님께서 처음 이 소수의 존재를 알려주셨던 그 수업시간,
짙은 녹색칠판과 칠판지우개의 줄무늬 홈을 따라 남겨진 하얀 분필가루 자욱

이창대 선생님과 내가 함께 사랑한, 물리학을 전공했다던 김종애 과학선생님과 
그녀의 얇상한 회초리
과학캠프 마지막날 아침 식사로 나온 카레라이스를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던 
그녀의 하얀 손가락과 얇실한 입술의 움직임까지를 단박에 떠오르게 한다. 

Prime Number Bot 이 우연스럽게 불러일으킨 소수에 대한 추억과 
그 수들의 영속적인 배열을 닮은 영원성의 가치가 
2011년 여름, 매서운 빗줄기에 상처 입은 도시의 아픔을 잠시 잊고 
13세 소년 시절의 기억을 되새겨준다. 

2011년 7월 26일 화요일

세~탁~





2000년 9월 초 어느날

이날은 사춘기 시절부터 키워오던 베를린 횡단의 꿈을 이룬 날로 기억된다.

장벽이 붕괴된 직후, 당시 기술 샘께서 섭시간에 장벽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몇개의 돌덩이를 아이들에게 돌려가며 관람(?)을 시켜줬었다..
붉은색, 푸른색 시멘트가 살짝살짝 묻어있는, 붉은 벽돌에서 떨어져나왔을 법한 돌 조각이 내게로 전달돼 오자, 난 책상위 철제나사 부분에 슬며시 (하지만 힘껏) 돌 조각을 짓이겨 새끼손톱만한 돌맹이 조각과 시멘트 낱알들을 취했다~
(당시의 샘께는 두고두고 죄송스런) 장난끼에서였지만 장벽의 가치와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함의를 이제 막 깨닫기 시작한 철없던 당시의 나에겐 장벽 전체와 맞먹을만한 위대한 부스러기였다..

2000년의 9월 그날은 그런 장벽이 붕괴된지 만 10년 하고도 10개월째 되던 때였다.

베를린 동쪽 끝에서 출발해 분단 독일과 통일 독일의 흔적들을 밟아가며 서쪽을 향하던 나는 서베를린 지역의 초입에 위치한 작은 하천을 지나며 이 퍼포먼스를 목격하게 된다.

(솔직히 하천의 이름이며, 지명은 생각 안난다..) 오래전부터 베를린 시민들의 공동 빨래터였던 이곳은 반세기 동안의 분단으로 제 역할을 못했고 장벽이 붕괴된 이후에는 상하수도 시스템의 발달로 역사속에 묻혀졌다.

사람들의 생활은 물가에 쭈그려 앉아 찬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세제도 없이 검댕이만 떨어내던 그 시절의 빨래방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진화했지만,
찬물, 더운물은 물론이고 세제, 탈수, 건조까지 자동으로 해주는 세탁시스템을 갖추고도 베를린 시민들은 그 옛날 이 곳에서 어울려 빨래를 하던 시절보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아우성이었다.

이 퍼포먼스는 그 옛날 고단했지만 화합과 소통이 있던 빨래터를 현대식으로 기억해내고자 기획되었다. 아울러 세탁조 속 빨래들이 한데 엉켜 돌아가며 새 것같은 옷들로 재탄생하듯 국제사회가 화합하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는 메세지도 담고 있다고 했다.

몇일후면 독일 통일 15주년(※2011년 현재 21주년), 여전히 들려오는 아우성과 거침없는 세계화의 진군.. 그리고 나..

사춘기 시절 그 '위대한 부스러기'는 독일제 스탠다드 제도기 셋트내 콤파스 연필심 보관통에 담겨져 지금도 내 방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철없던 나의 소유욕에 관용을 베풀어주길 바란다.

※ 다시 보는 싸이글 2004.10.12 13:14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모든 것을 감수해야 소통이다"

이찬진님의 프로필 사진
이찬진  -  2011. 7. 20.  -  공개
유명한(그리고 제가 보기에 아주 훌륭한신) 어떤 교수님 특강을 들었는데, 커뮤니케이션(소통)은 쌍방이 원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착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뭔가를 아쉽고 간절히 원하는 한 쪽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어떻게 보면 상대를 괴롭혀가면서까지 해서 결론적으로는 양 쪽이 좋아지는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소통은 서로 힘들고 괴로운 거라고요.

그 아쉬운 한 쪽은 모든 것을 감수해야지만 소통했다고 할 수 있지, 한 번 띡 해보고서 상대가 호응하지 않아서 안됐다고 비난하고 포기하는 건 진짜 소통이 아니라고도 하셨구요. 요즘 정치권의 그리고 대통령의 소통부재를 생각하면서 들으니 더 실감이 나더군요.(이 글에 대해서 정부나 대통령을 비난하는 댓글은 주제에서 벗어나니 달지 않으셨으면... ^^ 그리고 심하면 제가 삭제할지도. ㅠㅠ 예의를 지키고 상대를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는게 소통일테니까요. ^___^)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세가지 방법이자 구성 요소는 설득(persuation), 조작(manipulation - 아마 좋은 의미의 ^_^), 구걸(begging)이라고 하시는 부분에서는 너무나 가슴에 와닿더군요. 특히 조작 부분은 이해가 안되는 분들도 계실텐데 저는 너무나 절절하게 와닿더군요. 그리고 구걸도... ㅠㅠ

제 글이 이해가 잘 안가시는 분을, 위의 글에 들어가는 '커뮤니케이션(소통)'이라는 단어 자리에 여러 분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힘든 커뮤니케이션이었을 '구애(혹은 청혼)'이라는 단어를 넣어 보시면 '확'하고 와닿을실 겁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되는 아해들은 가라... -__- 비암...

2011년 7월 17일 일요일

외할아버지 기일

하루 왠종일 아무 내색 않던 어머니는
드라마를 보시다가 외할아버지가 보고싶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갑작스런 감정폭발에 나머지 식구들은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속을 비워내고 나올때까지 어안이 벙벙

그리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드라마는 이어지고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