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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0일 수요일

"모든 것을 감수해야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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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진  -  2011. 7. 20.  -  공개
유명한(그리고 제가 보기에 아주 훌륭한신) 어떤 교수님 특강을 들었는데, 커뮤니케이션(소통)은 쌍방이 원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착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뭔가를 아쉽고 간절히 원하는 한 쪽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어떻게 보면 상대를 괴롭혀가면서까지 해서 결론적으로는 양 쪽이 좋아지는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소통은 서로 힘들고 괴로운 거라고요.

그 아쉬운 한 쪽은 모든 것을 감수해야지만 소통했다고 할 수 있지, 한 번 띡 해보고서 상대가 호응하지 않아서 안됐다고 비난하고 포기하는 건 진짜 소통이 아니라고도 하셨구요. 요즘 정치권의 그리고 대통령의 소통부재를 생각하면서 들으니 더 실감이 나더군요.(이 글에 대해서 정부나 대통령을 비난하는 댓글은 주제에서 벗어나니 달지 않으셨으면... ^^ 그리고 심하면 제가 삭제할지도. ㅠㅠ 예의를 지키고 상대를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는게 소통일테니까요. ^___^)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세가지 방법이자 구성 요소는 설득(persuation), 조작(manipulation - 아마 좋은 의미의 ^_^), 구걸(begging)이라고 하시는 부분에서는 너무나 가슴에 와닿더군요. 특히 조작 부분은 이해가 안되는 분들도 계실텐데 저는 너무나 절절하게 와닿더군요. 그리고 구걸도... ㅠㅠ

제 글이 이해가 잘 안가시는 분을, 위의 글에 들어가는 '커뮤니케이션(소통)'이라는 단어 자리에 여러 분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힘든 커뮤니케이션이었을 '구애(혹은 청혼)'이라는 단어를 넣어 보시면 '확'하고 와닿을실 겁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되는 아해들은 가라... -__- 비암...

2011년 7월 17일 일요일

외할아버지 기일

하루 왠종일 아무 내색 않던 어머니는
드라마를 보시다가 외할아버지가 보고싶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갑작스런 감정폭발에 나머지 식구들은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속을 비워내고 나올때까지 어안이 벙벙

그리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드라마는 이어지고 하루가 간다

2011년 6월 22일 수요일

소녀시대와 스테판 에셀

한국 아이돌 그룹의 프랑스 현지에서의 반향과 『분노하라』의 한국에서의 반향
어느쪽의 반향이 더 클까?
두 사건의 반향의 크기를 측정하고 비교하는 것은 가능한가?

A. 파리에서 한국 아이돌들의 콘서트가 열리고, 파리의 청소년들이 그(녀)들 아이돌그룹에 열광하는 장면이 '한류의 유럽침투'란 제호로 몇주째 국내방송에 소개됐다.
공연 개최를 요구하는 퍼포먼스가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펼쳐졌고, 현지 언론에서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은 한국의 아이돌그룹이나 한류 침투를 아직 알지 못하며, 한국이란 나라 역시 아직은 낯설다.

B. 프랑스에서 레지스탕트 출신 고령의 지식인이 출간한 『분노하라』가 순식간에 200만부 이상 팔렸고, 이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다.
출간 이전부터 일부 언론에서 주목을 받았고, 출간되자마자 각종 온라인서점 상위권에 랭크되는 등 각광을 받고 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저자인 스테판에셀은 물론이고 프랑스혁명의 정신인 자유,평등,박애가 왜 지금의 우리사회에 유의미한지 알지 못한다.

당장에는 A와 B간의 반향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도 어렵고, 닮은 듯 보이지만 별개의 사건으로 여겨지기에 흥미있는 주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서 물어보면 어떨까?
"마케팅의 목적으로 또는 문화적 충격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국내 언론들은 두 사건 모두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대중에게 해석을 제시했다"는 주장에 어느 쪽의 지지자들이 보내는 이의제기가 더 강할까?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의 서문에서 언급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독립된 언론이 필요하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명제이다.
그리고, 저자의 지적처럼 현대 사회는 복잡다양해서 분노의 대상을 간별해내는 것이 그가 레지스탕스와 인권 활동을 했던 시기보다 한층 어렵다.

저자는 꿈에라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한국의 독립된 언론은,
애국심으로 무장한 절대 다수의 나르시스트 국민들에게 한류의 자부심을 불어넣기도 하고,

자국 사회의 후진성을 유럽에 대한 사대주의에 의존해 경멸하고, 조소하기도 한다.
스테판 에셀 옹의 『분노하라』가 일으킨 프랑스혁명 정신의 재조명, 레지스탕스 정신의 부활, 세계인권선언의 모티브에 담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옹호론이 우리나라 -근대화 100년을 겪고도,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과 정신의 극심한 빈곤의 시간을 살아가는 한국- 다수의 국민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