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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5일 일요일

어린 시절 나의 알바는 선배들의 레포트를 타이핑해주는 것이었다. 손으로 쓰는 레포트 시대를 살아온 늙다리 선배들은 컴퓨터로 편집해 제출하는 레포트 시대로의 변화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취업공부와 학점 관리를 병행해야 했던 그들은 한때 거리에서 꽃병과 쇠파이프를 가까이 하던 당대 진정한 워리어들이었고, 그런 명예에 걸맞게 -키보드 워리어가 좌파진영을 선도하게될 세상을 내다보았던 것일까- 좀처럼 키보드를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 
그런 선배들의 레포트를 타이핑해주는 일은, 독수리 50타를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자, 노동의 대가로 얻은 진한 술자리를 통해 나의 네트워크를 넓혀주었음은 물론, 플로피 디스크에 차곡차곡 쌓여나간 레포트 초고들은 두고두고 나의 대학생활에 여유시간을 공급해 주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정립한 알바의 원칙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울 것이며, 인적 네트워크의 깊이와 폭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포트폴리오를 풍성하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바빠죽겠다가 모처럼 쉬는 날 이런 원칙에 부합하는 알바 요청이 있어서 거부할 수가 없다. 
역시 원칙이 있으면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