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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6일 화요일

몽상가들 [050815]


꿈꾸는 상호 라는 필명으로 응집된 내 젊은 날은 무한한 자유와 사랑을 만끽하고자 했고, 욕망으로 가득찬 시절이었다. 정치학을 택했고 그로인해 내 젊은 날에 사회과학의 잔상이 남아있게 된 것은 꽤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다.
그것은 10여년이 지난 오늘 돌이켜보더라도, 하마터면 감성만으로 점철되어 껍데기뿐일지도 모를 내 젊은 날에 늘 호흡을 불어넣었고 욕망의 시절을 중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농담 삼아 마르크스와 그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신의 세계에 빗대어 표현하곤 했지만 실제로도 내 삶에서 그것은 신의 세계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다시말해 그것은 내 젊은 날 신앙의 대체물이었다.

테오, 이사벨, 매튜..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은 '68이라 특징 지워진 시절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서 좀처럼 구현되지 않았던 것처럼 사회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땅에서 구현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마저 보이지 않을때 우리에게 신좌파의 상상력은 마르크스가 언약한 땅으로 들어가는 꿈의 열쇠였다.

그러나 그 열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지닌 가장 강하면서도 가장 나약한 무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무한한 자아의 표출과 에로스 효과 -그것은 자칫 아무 상관없을 개인과 개인의 자아를 엮는 위대한 응집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 특징지워지는 신좌파, 그들의 상상력은 욕망을 도구화했고, 자본주의로 하여금 욕망을 정교하게 조작할 필요성을 일깨웠다.

한때 미국의 신좌파 운동을 보면서 왜 그들은 계급적 한계와 분파적 이해를 뛰어넘는 운동형태로 나아가지 못했는지 답답해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에서나 유럽에서나 그들이 꿈꿨던 혁명은 해프닝일뿐이었으며 그 해프닝은 마치 마리화나의 환각상태와 같이 현실로의 귀환을 예정하고 있다. 환각의 경험을 가진 유럽과 환각의 경험을 갖지 않은 미국 사이의 간격은, 내 젊은 시절 동경했던 유럽과 현대의 유럽 사이의 간격만큼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는 그 자신이 겪은 위대한 사랑의 시기였던 프랑스에서의 68을 기록하고 있지만, 철저하게 꿈과 현실을 구분함으로써 다소 냉소적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병력들을 향해 화염병을 안고 돌진하는 테오와 시위대가 나아왔던 그 길을 거꾸로 되돌아 가는 매튜. 라스트신에서의 이러한 대비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현실세계로 함께 돌아갈 것을 애절하게 간구하는 매튜를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졋는 이사벨.
이사벨의 미소는 꿈과 현실은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음을,
운명적으로 양갈래길에 도래해서는 서로 다른 길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조용히 타이르고 있다.

"매튜, 너와 나는 처음부터 하나가 될 수 없어. 너의 길을 가.
나의 길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혹자는 베르톨루치가 꿈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복종하는 부르조아일 수밖에 없었음을 힐난했지만, 그 정도의 아쉬움쯤은 열흘이 넘도록 자나깨나 내 머리속을 지배했던 제안서로부터의 뜻밖의 해방을 기념한 정도로 채워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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