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이 블로그 검색

2006년 10월 27일 금요일

나는 소통한다 [우행시] 2006년 9월 셋째주

 

 

공지영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나영의 낯설지 않은 연기와
강동원의 우물거리는 대사처리를 기대했고
영화를 통해 그것보다 꽤 괜찮은 감동까지 얻을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탓에 영화가 시작할 때서야
"이거 내용이 뭐야?"라고 녀석에게 물었다.
원작이 공지영의 소설이란다..  

 

1994 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가 출간됐던.. 대학 2학년때였다..
전대협이 한총련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전환되었고
학생운동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시각들이
줄을 이었다.

 

정치투쟁이 아닌 문화운동에서 해법을 찾는 시도가
시작된 것도 그때쯤이었고, 여성주의에 대한 반향도 시작되었다.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 역시
그러한 다양한 시도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게 '인간에 대한 예의'는 제도권으로 편입된
운동권 출신 이야기꾼의 넋두리일 뿐이었다.

 

2006 공지영

94년 이후 공지영 기피 습성을 지속해오던 내게
아주 우연히 '우행시'가 왔다.
인간 본질과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관계에 대한 탐닉
이라는 주제에 있어 공지영과 나는 원래 통하는게 많았다.

(여기에 한 사람 더.. 김윤아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인간에 대한 예의' 시절에도 그러했지만
당시의 나는 그 관계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길 고집했었다.

 

자아를 사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그래서 죽지 못해 사는 한 여자와 남자가 있다.
완전한 타인들간의 만남.
상대의 내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기까지에는 이렇듯

타인과의 소통이 전제되어야 했다.

 

우리는 소통한다.

딱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만한 이유도 없던 시간들..
딱히 죽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만한 이유도 없던 시간들..

 

죽는 것보다 용서가 더 힘들었다는
여자의 절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의 존재를 스스로 가볍게 여기는 정신병리학적 상태에서
이제 막 벗어나는 중이다.

나는 다시 소통한다.

 

하나더.

원작에서는 남자가 죽은 동생에 대해 갖는
미안함과 애착이 크게 두드러져 있고,
남자가 죽은 후에 남긴 슬픔과 감동이 훨씬 강하다고 한다.

공지영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이해한 것으로
원작의 감동을 대신한다.

 

하나더. 화목제

구약성서에서 화목제에 대한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원래는 유목민들간에 분쟁을 종식하는 제도가
신과 인간간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간의 화해의 상징으로 동물의 피로
언약을 맺고 어쩌고..

여기서 의미하는 화해는, 권력적이고 남성적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굴종을 맹세하고 다시는 대들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하는 일종의 강화조약인 셈이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가 피를 흘림으로써
더이상 신과 인간간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간에
화목제는 필요가 없다.

여자가 절규하며 죽는 것보다 힘들었던
용서를 했다고 고백할 때,  

신약의 여성성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나더. 기억에 남는 대사 몇개

-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건 마법이고 마술이지,
  사람이 변하는게 기적이지.

- 애국가를 불렀는데도 무서워요.

- 나에게는 죽는 것보다 용서하는게 더 힘들었다는걸
  하나님을 만나서 얘기해주고 싶었거든.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