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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일 금요일

살아남기 위한 슬픈 투쟁[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투쟁은 생존이 위협받는 극단의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다.

 

"나부터 살고 보자"
값싸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투쟁에 관한 가장 진솔한 표현이다.

극단적인 투쟁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배고파 죽겠어서 하는 투쟁이다.

 

따라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건 사회적이건 어떠한 가치를 위한 투쟁에는
어떤 방식이든 협상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좌파의 투쟁이 사회주의 가치의 실현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존을 아젠다로 내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혁명 대오를 투쟁의 극한으로 몰기 위한 전략이었고
마르크스는 가치의 문제를 생존의 문제로 탈바꿈시키는데
꽤 과학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정치적인 투쟁도,
20세기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로맨틱한 투쟁도,
실패의 이유는 단 하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전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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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배경은 아일랜드 독립과정이다.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들의 의지와
그 과정에서 IRA의 역할과 성격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곳에는 생존을 위한 폭력이 있고
폭력적 대치는 외부와 내부를 가리지 않는다.
억압하는 세력에 의한 협박의 '두려움' 때문에
투쟁 조직을 밀고했던 어린 소년(크리스)을 처형하는 도입부와
조직내부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간의 대립으로
형(테디)이 동생(데미안)을 처형하는 결말이 맞물려 있다.

 

이렇듯 이 영화는 투쟁이란 것이 내가 살기 위한 처절하고도 슬픈,
하지만 비인간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극단적 행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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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할 것인가, 협상할 것인가
고집스러운 사회주의와 이중적인 민족주의간에
어느 한편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투쟁을 생존의 문제로 치환시킬 능력이 없는 지도부는
일찌감치 협상의 방안을 고민하는 편이 모두를 위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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